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토니오 비발디 (문단 편집) === 갑작스러운 몰락 === 비발디는 50이 넘은 나이에도 오페라 작곡가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1733년에는 피에타 학교의 선생직을 그만두면서 [* 공식적으로는 1733년경까지 선생으로 있었지만 만토바에 갔다온 1725년 이후부터는 사실상 학교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학생들을 위해 곡을 쓰는 일은 1733년까지 계속 했다.] 산탄젤로 극장의 흥행감독 역할도 다시 맡게 되었다. 한편 비발디는 12번째 작품집 이후 자신의 악보 출판을 전면 중단했는데 출판사와의 수익배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보를 출판사에 맡겨 대량으로 찍어내는 것보다 부자나 귀족들에게 소량으로 비싸게 파는 것이 훨씬 이득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비발디는 돈 많은 음악 애호가들에게 소량의 필사된 악보를 비싸게 팔았다. 이런 판매전략은 악보를 산 사람 입장에서도 나름 만족스러웠는데, 대작곡가 비발디의 희소가치가 높은 악보를 소유했다는 자부심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간 비발디와 잘 거래를 하던 암스테르담의 출판업자들은 당연히 비발디의 이런 배신행위에 크게 반발했고, 결국 1737년 암스테르담에서 프랑스의 니콜라 셰드빌(Nicolas Chédeville)이라는 듣보잡 작곡가의 곡을 비발디의 13번째 작품집으로 출판하는 위작 출판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일화는 그만큼 비발디의 명망이 높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위작 출판에 대해 비발디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심각한 사안이었는데도 의외로 큰 이슈가 되지 않은 것은 기본적으로 악보가 잘 팔리지 않아서 그대로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셰드빌은 거의 아마추어급 작곡가였기 때문에 당연히 위작 협주곡의 수준도 처참했다.] 이렇게 잘나가던 비발디는 1737년을 기점으로 갑자기 몰락하게 된다. 한동안은 이 몰락의 원인을 비발디의 음악양식이 시대에 뒤떨어졌기 때문으로 파악했다. 당시 바로크 음악이 점차 저물고 고전파 양식의 음악이 대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변덕이 심한 오페라 관객들이 비발디의 음악을 시대에 뒤떨어진 음악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7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탈리아에서도 고전파 양식의 오페라가 점점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발디 생전에는 바로크 양식의 오페라도 여전히 인기가 있었고 비발디 사후에도 얼마 동안은 그의 오페라가 상연된 기록이 있다. 또한 비발디는 몰락시점인 1737년에도 활발하게 오페라를 작곡하고 있었으며 전술한 것처럼 이 해에 위작사태까지 벌어질 정도로 그의 명성은 여전히 높았다. 때문에 단지 고전파 음악의 대두만으로 그의 갑작스러운 몰락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최근의 연구로 그가 말년에 곤경에 빠진이유가 제대로 밝혀졌는데, 1737년에 큰 투자 실패가 몰락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산탄젤로 극장의 흥행감독이었던 비발디는 당시 작품선정과 공연일정을 두고 베네치아 오페라계의 다른 실력자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비발디가 작곡가로는 명성이 높았지만 흥행사업 측면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결국 비발디는 베네치아보다 상대적으로 경쟁이 적은 다른 지역에서 오페라 공연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 때 눈에 들어온 곳이 [[페라라]](Ferara)였다. 1736년 가을, 비발디는 만토바 궁정악장 시절 로마에서 인연을 맺은 페라라의 귀족 벤티볼리오 후작(Marchese Guido Bentivoglio)에게 페라라에서 자신의 오페라 파르나체(Farnace)를 공연하고 싶으니 성사시켜달라고 요청하고 이에 벤티볼리오는 당시 페라라 오페라 극장의 감독 아베 볼라니(Abbé Bolani)와 상의해서 추진하라고 허락했다. 그런데 볼라니는 비발디가 자신의 입지를 약화시킬 것을 우려했는지 공연을 성사시켜줄 것처럼 이야기해놓고는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비발디는 이미 공연에 대비해서 가수와 스태프들을 섭외하고 연습시키고 선금까지 걸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공연을 성사시키려고 했지만 볼라니는 계속 비협조적이었다. 벤티볼리오에게 항의를 해봤지만 볼라니와 잘 협상하라는 무성의한 답변만 받았다.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결국 두 해를 넘겨 1738년 초 카니발 시즌에 페라라에서 비발디의 오페라를 공연하기로 간신히 결정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페라라의 추기경 루포(Ruffo)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공연을 두달 정도 앞둔 시점에서 루포는 비발디처럼 신앙심이 없고 어린 가수와 염문이나 뿌리는 타락한 성직자는 기강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페라라에 들어올 수 없다고 갑자기 딴지를 걸었고 주연 가수로 낙점된 안나 지로도 페라라에 오면 안된다고 못박았다. 당연히 비발디는 항의를 했지만 루포는 융통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고 결국 공연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루포 추기경의 딴지는 정말 어이가 없는 수준인데, 정작 논란의 대상이었던 안나 지로가 루포가 시비걸기 직전까지 페라라에서 아무 문제 없이 공연을 했기 때문이다. 더 웃기는건 안나 지로는 1739년에도 페라라에서 공연을 했는데 당시 그녀의 출연작 중 하나가 비발디의 오페라 페르시아의 왕 시로에(Siroe re di Persia)였다는 것(..). 페라라의 공연에 왜 이렇게 목을 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튼 공연이 무산되면서 여기에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한 비발디는 말 그대로 파산상태가 되었다.[* 볼라니와 벤티볼리오 후작이 분명 자신들에게도 이익이 될 공연에 왜 이렇게 비협조적이었는지, 루포 추기경이 무슨 이유로 저런 어처구니 없는 훼방을 놓았는지 등등의 이유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좀더 연구가 필요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